[본문 조각 스크랩]

 얼굴이란 어떤 경우든 은폐와 신비화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야 상징과 표현이라는 두 개의 요소로 환원된다. 스무살인 나의 얼굴은 날마다 껍질이 벗겨지는, 아직 역할을 얻지 못한 쓸쓸하고 적막한 탈이었다.

 나는 아직 나이에 관한 개념이 부족해 얼마 되지 않은 내 경험 속에서 나이의 양과 성격을 가늠하곤 했다. 경험하지 못한 나이에 대해선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사실 이해마저도 피상적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노련한지 혹은 서툰지, 얼마나 늙었는지 아니면 아직 젊은지, 얼마나 안전한지 혹은 위험한지, 생에 대해 진지한지 기만적인지, 혹은 냉소적인지, 그리고 나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모든 것이 늘 오리무중이었다.

 나는 대화를 단념했다. 한마디만 대꾸를 해도 곧바로 아버지의 십팔번인 관용구가 튀어나올 것이다. 쓸데없는솔, 혹은 턱도없는 소리. 어른들은 대화를 하지 않고 각자의 관용구를 울부짖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엄마는 아이고 무서워라, 인간이 무섭고 세월이 무섭고 돈이 무섭다라고 하고, 할머니는 귀신도 눈이 멀었지 왜 나를 아직도 안 잡아갈까라고 한다. 그리고 동생들은 누군가를 향해서라기보단 달을 향해 짖는 늑대처럼 두 눈을 꽉 감고 누구도 아닌 것을 향해 큰 소리로 울부짖거나, 웃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법석을 떨 뿐이고 나는 침묵한다.

 댁은 커서 전화국 직원이 되고 싶었어요? 이미 다 커버린 나는 묵묵히 전화국 직원을 노려보았다. 자라서 소도시 전화국이나 우체국, 동사무소 같은 데에서 일하게 되는 인간들은 어떤 꿈을 꾼 것일까. 나는 그들을 볼 때 오직 그런 의문만이 들었다.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는 인생을 살겠다고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예기치 않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생. 

 나는 그 일을 더이상 문제삼지 않았다. 그즈음엔 늘 그런식이었으니까. 나중에 알게 될 일투성이. 모든것은 유보되어 있었다. 삶은 기다림이다. 당장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무살이란 아직 시간 이전에 붙박여 있는 나이였다. 손오공이 얼굴만 내놓고 바위벽에 갇혀 있듯이. 삶이란 좀처럼 시작되지 않는다.

 둘 다 반말이었다. 높임말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 태도였다. 어쩌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퉁겨져나온 나사못 하나처럼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안도감은 어딘가 불편하고 구차하고 밀도가 형편없어. 창녀촌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도, 아직 그곳에 있는 것만 같은 낯익은 좌절감이 엄습하거든.

 고흐로 인해 카드뮴옐로는 광기의 색이 되었다. 모든 광기가 그렇듯 고흐의 옐로는 불투명하다. 출구 없는 고통이 야기한 혼란의 손질처럼 무수히 덧칠되어 색 자체가 틍증의 물증처럼 두껍다. 

 "수련아, 지구상의 사람들 육십오 퍼센트가 환생을 믿는단다. 누가 그러는데, 살아생전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는구나. 그러니까,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인 거야."
 아까부터 카운터에 걸터앉아 팔꿈치를 세우고 두 손으로 얼굴을 싸안고 있는 마담이 말했다.
 "피, 거짓말.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요?"
 "그러면 다시는 안 태어나지."

 어른들은 습관과 의무 속에서 살고 아이들은 충동과 잔소리 속에서 살며 나는 몽상과 도주의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았다.

 "넌 뭐가 되고 싶니?"
 성재가 물었다
 "몰라. 하지만 뭔가 특별한 것이 되고 싶어."
 "넌 빛나는 사람이 되소 싶은 거구나."
 "아니야, 대단한 게 되려는 건 아니고 나를 발견하고 싶은 거지. 내 속의 나를 꺼내보고 싶은 거야."

 "넌 뭐가 되고 싶니?"
 그녀는 거리의 좌판에서 도금목걸이를 고를 때처럼 가볍게 물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언제나 나를 난처하게 했다.
 (중략)
 "난 말이야, 패션 디자이너가 될 거야. 구월부터는 학원에 등록할 거야. 몇년 후에 사람들은 내가 만든 옷과 내 얼굴을 잡지에서 보게 될 거야. 그 다음엔 밀라노나 파리에서 공부를 할 거고 십년쯤 후엔 세계적인 패션지에도 얼굴을 내보일 거야."
 마리는 꿈이란 이렇게 꾸는 거야, 하는 식으로 오만하게 눈을 치떴다. 과연 멋진 꿈이었다.

 어떤 여자는 원래 나이가 많게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생을 알고 몇번이라도 다시 사는 것처럼 노회하게 살아가는지도...... 그녀에 비하면 나는 아주 어린 여자로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쉽게 자라지도 않고 쉽게 나이 들지도 않고 도저히 나를 초대한 이 세상에 익숙해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뒤섞인 상인들과 행인들을 골똘하게 내려다보고 있으니 가슴이 얼얼해졌다. 누구나 구체적으로 살고 있었다. 삶을 손으로 잡고 피부로 느끼고 맛을 본다. 중력을 어깨에 지고 두 다리로 정직하게 나르며. 나만 추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자.

 할머니는 실제로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죽음을 등진 채 덧없이 여름을 낭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죄책감은 달콤한 우울 정도일 뿐이었다. 실제로 할머니의 간호를 하는 일은 슬픔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일종의 싸움이니까.

 어쩌면 삶이란 꿈 따윈 없이 사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집 밖에서, 세상에 없는 것을 헛되이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불행과 도주도 습관이 된다.

 "이렇게 되려고 한 건 아닌데. 난 지금 어딜 향해서 가는 걸까. 갑자기 벼랑이 나타날 것만 같아. 방향을 돌릴 수도 없는 좁다란 지점에서, 나는 그때 무사히 뒤로 걸어나올 수 있을까."

 "넌 괜찮니?"
 그가 얼마나 염려스럽게 말했는지, 나에게 생긴 나쁜 소식을 나만 모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디스코텍에서 나와서도 나는 유독 웃어댔다. 해경이 그런 나에게 할말이라도 있는 듯 화난 얼굴로 쳐다보았다. 웃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이번엔 눈물이 어렸다. 몸 속의 얼음 조각이 녹듯이 두 눈에 아슴한 김이 어려 부풀어오르다가 눈을 깜박일 때면 그만 툭 터지며 흐르는 눈물. 눈물 속에 엄마의 얼굴이 커다랗게 팽창해 앞을 막아서곤 했다. 엄마만 아무도 속이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았다. 잔인한 삶을 한순간도 속이지 못하고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

 "이 밀리미터 빗방울은 공처럼 둥글고 그보다 큰 빗방울은 기압에 눌려서 가로로 퍼진대. 그래서 햄버거같이 납작한 모양이 되는 거야. 그리고 빗방울이 팔 빌리미터 이상인 경우는 기압이 구멍을 뚫기 때문에 낙하산처럼 공중에 떠다니면서 천천히 땅 위에 떨어진대. 아쉽게도 눈물 모양 빗방울은 존재하지 않아."

 "선생님이 돌아와도 이제 연극 따윈 하지 않을 거야. 자칫하다간 인생에서 연기를 하게 될 테니까. 연기와 인생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어. 이번에 연극을 하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정해진 대본으로 연기를 한다는 걸 깨달았어. 서로 대본을 모르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어서 어긋나거나 스치고 말아. 말이 안통하네, 마음이 안 통하네, 이해가 안 되네, 수준이 다르네 하면서. 너의 대본에 대해 나는 몰라,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서로의 대본을 알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자기가 아는 대본대로만 연기하도록 요구하는 거야. 더 이상하거나 다르면, 크게 속았다고 생각하지. 서로를 자기 대본 속에 가두려고 혈안이 되는 거야. 정말 끔찍한 감금 아니니? 난 뻔한 대본 속에 갇히지는 않을 거야. 진짜 삶을 살 거야. 진짜 삶은 조각조각 찢긴 대본처럼 불안정할지 모르지만, 그건 자신에 대한 발견이야."

 성장은 사회의 적응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로부터 멀어지고 상처받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젊음은 꿈결같이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라 상처를 뒤집어볼까봐 두려운 시절로 존재한다. 열정이 사라진 황폐한 일상이야말로 삶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 바로 성장이다. 스무살, 그것은 안정된 길로 접어드는 통과의례의 나이가 아니라 앞으로의 기나긴 삶에 처음으로 상처를 새겨넣게 되는 나이다.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 [밤의 나선형 계단]
Trackback 0 And Comment 0

javascript:function r(d){d.oncontextmenu=null;d.onselectstart=null;d.ondragstart=null;d.onkeydown=null;d.onmousedown=null; d.body.oncontextmenu=null;d.body.onselectstart=null;d.body.ondragstart=null;d.body.onkeydown=null; d.body.onmousedown=null;};function unify(w){r(w.document);if(w.frames.length>0){for(var i=0;i<w.frames.length;i++){try{unify(w.frames[i].window);}catch(e){}};};};unify(self);

를 주소창에다 때린다.
적용률은 반반정도.

'Comme ci comme c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넷에서 우클릭이 안 되면  (0) 2009.06.21
Testing  (1) 2009.05.20
Trackback 0 And Comment 0



[본문 조각 스크랩]

 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늘 말했잖아. 안 듣고 다니냐, 내 말."
 시노부는 불만스러운 듯이 부먹밥을 덥석 물었다.
 "쇼크인걸. 그래서인가, 여자아이들이 다가오지 않는 건."
 "그걸 깨닫는 데 2년 정도 늦구나, 너."

 무표정하다고 할까 쿨하다고 할까,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힘이 없거나 독불장군인 것도 아니고, 남자아이들에게는 의외로 인기가 많으며 존재감도 있다. 정신활동의 온도가 낮고 일정하다는 느낌이다.
 
 일상생활은 의외로 세세한 스케줄로 구분되어 있거 잡념이 끼어 들지 않도록 되어 있다. 어느 것이나 익숙해져 버리면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할 수 있다.
 오히려 장시간 연속하여 사고를 계속할 기회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생활에 의문을 느끼게 되며, 일단 의문을 느끼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촘촘히 구분하여 다항한 의식을 채워 넣는다. 그러면 의식은 언제나 자주 바뀌어가며 쓸데없는 사고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진다.

 "역시 있구나. 그런 청춘 드라마 같은 짓을 하는 사람."
 다카코가 진지하게 중얼거리자, 리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것에 감탄하지 마."
 "그렇지만 말이야, 얘기로는 자주 듣잖아?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흔히 나오고. 현여름 밤의 경험, 임신했다, 낙태했다, 모두 몰래 비용을 모았다. 그렇지만 난 그게 도시 전설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어. 친구의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하는 류의."
 "알 것 같아. 너무 정형화되어서 리얼리티가 없지."
 
 우리의 '인생'은 아직 멀었다. 적어도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들의 '인생'은 시작되지 않는다. 암묵적으로 그렇게 되어있다. '인생'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조금밖에 없다. 기껏해야 그 궁핍한 빈 시간을 변통하여 '인생'의 일부인 '청춘'인지 뭔지를 맛보자고 하는 것이 고작이다.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인생'을 그 얼마 안 되는 빈 시간의 메인으로 삼아버린다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다카코는 겉보기에는 무심해 보이지만, 알맹이는 의외로 순정파라니까"
 "무심해 보인다기보다 반응이 늦은 거지. 신경전달이 둔해서 얼굴에 감정이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야."
 "아하하."
 "이거 정말이야. 그러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한참 시간이 지나서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는 거야. 자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 좀 심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빌어먹을, 그렇게 심한 말을 아다니.' 하는 식으로."

 생각해 보니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소문이지만, 이런 가십은 화제로서는 꽤 오래 가므로 좀처럼 아무도 말리려 하지 않는다.

 경치 같은 것, 제대로 보지 않았구나.

 "잔혹한 녀석이군. 오히려 사촌여동생을 공개처형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나."

 밤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언제나 한순간의 일이다. 그때까지는 아직 밝다, 아직 초저녁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빛과 어둠의 비율이 역전되어 있다는 것에 놀란다.

 "저 녀석, 특별한 녀석들과 친하군. 친구 필요 없습니다, 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네가 빨리 훌륭한 어른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홀로서기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건 잘 알아. 굳이 잡음을 차단하고 얼른 계단을 다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말이야, 하지만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 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네게는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 건 지금 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너, 언젠가 분명히 그때 들어두었다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할 날이 올 거라 생각해."

 의외로 피곤한 것은 눈이다. 하루 종일 초행길을 계속 걷고 있으니, 눈은 필사적으로 주위의 정보를 모으고 있다. 손목시계를 보면서 좀처럼 초점이 맞지 않아 눈을 깜박이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지금까지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귀찮지만 고등학교 마지막 기념 행사로서 좀더 여러 가지 것들을 제대로 생각할 계획어었는데. 여러 가지 것들을 제대로.
 생각해 보면 매년 이랬건 것 같다. 행사 당일까지는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우물쭈물하지만, 막상 시작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마음에 남는 것은 기억의 웃물뿐, 끝난 후에야 겨우 여러 장면의 단편이 조금씩 기억의 정위치에 자리 잡아가며. 보행제 전체의 인상이 정해지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그때는 어떤 인상으로 남게 될까.
 기억 속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 자리잡고 있을까. 나는 후회하고 있을까, 그리워하고 있을까. 내가 어렸구나 하고 쓴웃음을 짓고 있을까. 빨리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빨리 정위치에 자리 잡아주면 좋겠다.

 "신용이 없구나, 나란 인간."

 "타인에 대한 부드러움이 어른의 부드러움인걸."

 얼핏 쿨하게 보이는 시노부가 겉모습과는 달리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녀석이라는 것도 의외였다.

 "솔직한 아이네"
 "솔직하다고 할까. 뭔가 이상해. 사랑이 없어. 타산적이야, 타산적. 연애를 하고 싶은 것뿐이야. 나 남자친구 있습니다, 하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럼 그 이야기, 물론 나시와키에게는?"
 "하지 않았어."
 "어떻게 할 거야? 둘이 사귀게 되면?"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도오루에게 들릴리도 없을탠데.
 "그러게 말이다. 사귀기 시작한 후에 말해봐야 심술 같을 거고."

 야비하구나.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 하다 어머니가 불쑥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그 이상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생략되어 있었다 - 아버지 자신이 저지른 짓이 스트레스가 되어 위를 다친 것이며, 병이 난 것으로 용서를 받은 거라 생각할 셈이었던 것이며, 두쌍의 처자를 남기고 혼자 이 세상에서 달아난 것이며.
 그렇다, 달아난 것이다, 아버지는. 두쌍의 모자를 지켜보는 것으로부터도, 혼자서 처자식의 경멸을 견뎌가는 것에서부터도.

 고통스러웠을 거야.

 지금까지 굳이 인정하지 않았지만, 도오루가 느낀 진짜 불쾌함은 실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고다 모녀는 멋있었다.
 겅은 수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어머니 쪽은 품격이 있고 당당했으며, 교볻 차림의 딸은 아주 침착하며 총명함이 얼궁에 배어 있었다. 거기에 비해 기력을 잃은 유족인 자기네 모자는 어딘지 쓸쓸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열들감을 느낀 것이 그에게는 굴욕적이며 불쾌했던 것이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저주같은 의지뿐이다. 길고 긴 행렬을 그 강박관념만이 지탱하고 있다.

 "일단 비밀로 해주지 않을래? 그런 것, 문제로 삼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런 것, 어째서 타인에게 말할 필요가 있는 거지?"
 유이치는 왜 그런 바보같은 부탁을 하니, 하는 얼굴로 다카코를 보았다.

 "다카코가 신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 관대한 탓이라고 생각해."
 "엉?"
 다카코는 의아한 듯이 유이치의 얼굴을 보았다.
 "다카코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말을 줄곧 발견하지 못했는데, 지금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관대함'이라는 것을 알았어. 우리 정도의 아이에는 그런 얼굴이 드물기 떄문이지. 다카코는 처음부터 용서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용서 따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다. 역시 유이치의 눈은 통찰력이 없다. 아니, 그는 성격이 좋고 이성적이어서 사물을 보는 눈이 부드러운 것이다.
 나는 포기하고 있다. 달아나고 있다. 타인에게 부정되거나 받이들여지지 못하는 것이 두려워서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도 용서 따위 하지 않았으며 용서할 생각도 없다. 그야말로 지금 이곳을 걷고 있는 누구보다 오들오들 떨며 번들번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말하지 마."
 "물론, 아무에게도 말 안 해."
 "어차피 고백할 마음 따위 없거든."
 "어째서?"
 치아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 고백한다고 어떻게 될 것도 아니고. 별로 어떻게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재부터 수험준비 열심히 해서 졸업하는 것뿐이잖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 좋아."
 치아키가 하고 싶어하는 말은 잘 알았다.
 좋아한다는 감정에는 답이 없다. 무억이 해결책인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스스로도 좀처럼 찾을 수 없다. 훗날의 행복을 위해 가슴속에 간직하고 허둥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어떻게 매듭을 지으면 좋을까. 이떤 상태가 되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 괜히 행동을 일으켜 후회하기보다 마음속에만 소중이 간직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는 것이다.

 미와코는 얼른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이런 점도 미와코 답다. 금세 기분을 바꾸어 이러니저러니 험담하지 않으며, 혼자서도 행동 할 수 있다.

 "미와링은 여름방학 숙제, 깔끔하게 전반에 끝내는 타입이지?"
 "아냐. 힘들어질 것 같은 것만 본능적으로 간파해서 그때그때 해치워. 난 정확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앞뒤만 맞추는 타입이야."
 "그것고 재능이야. 나 같으면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시간이 안 맞는데, 하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게다가 기분 나쁜 예감까지 맛보면서도 결국 끝까지 노는 타입인걸."
 "그럴지도."
 "그것도 전혀 즐겁지 않아, 그 놀이가. 놀려면 즐거워야 할 텐데, 줄곧 숙제가 걱정되어 조금도 즐기지 못하는 최악의 타입."
미와코는 쿡쿡 웃었다.
 "그럴지도."

 여름방학 때의 그 불쾌한 느낌. 바로 저기까지 끝이 다가와 있다. 하루하루 확실하게 다가온다. 지금 시작하면 아직 해낼 수 있다.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하면, 시작한 만큼 어떻게 된다. 그렇게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도저히 손을 대지 못하는 악순환. 일단 책상에는 앉아 보지만 다른 일을 하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시작하여 핵심 과제의 주위만 어물쩍거리다, 중요한 것은 조금도 시작하지 못한다. 하루하루 미루는 동안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후회막급의 심정으로 해야 할 일의 양에 기겁하게 되는 여름의 끝.
 어째 이렇게 칠칠치 못한 아이일까. 다카코는 뜬금없는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건 너무 아름다운 의견이라고 생각하는데. 걔, 꽤 잔혹한 데가 있어."

 "그것고 그렇구나. 그렇게까지 솔직하면 인생 편할지도 모르지."
 미와코가 자기 대신 확실하게 불평을 해주어서, 다카코는 우치보리 료코에 대해서 관대해질 수 있었다.

 "으음, 지금도 좋아하지만, 앞으로 계속 사귀어도 더 이상 발전할 것 같지 않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으니까."
 "너무해. 아까워. 그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있다구. 왜 또 그런."
 미와코가 피식 웃는다.
 "다카코니까 말하는데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뭐라고?"
 "아마 그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우리 무척 교만했다고 생각하는데, 서로 우리 커플은 환상적이라고 믿었어. 물론 그는 멋있었고 좋은 점도 많아 거기에 끌렸지만, 우린 좋은 점이 많은 멋진 상대에게 걸맞는 자신을 자화자찬하고 있었을 뿐이야. 우린 정말 멋지지, 하고 함께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을 뿐이라고. 서오 작년쯤부터 어렴풋이 그런 생각은 했지만, 올해 들어 확실히 그걸 자각한 거지. 그러고 나니 둘 다 그걸 견딜 수 없게 된 거야,"

 "그렇긴 하지만 분명 뭔가 했을 거야. 그래도 안나인걸. 엽서에 쓰면서 그렇게 적당히, 무책임한 말은 하지 않아."

 "시시한 풍경이구나."
 "그렇게."
 "그러나 이제 평생 두 번 다시 이 자리에 앉아서, 이 각도에서 이 경치를 바라보는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부터 걸오온 길의 대부분도 앞으로 두 번 다시 걸을 일 없는 길, 걸을 일 없는 곳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앞으로 얼마만큼 '평생에 한 번'을 되풀이해 갈까. 대체 얼마만큼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걸까. 어쩐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우와, 정말 싫다. 재수없는 계집애."
 "그렇지. 그래서 걔는 이런 식으로 나시와키와 함께 걷기를 노렸던 것이라 생각해."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빌어먹을, 나도 말해줘야지. 꼴좋다."
 "꼴 좋다."
 "뭐야, 뭐가 꼴 좋다는 거야."

 "정말, 어지간히 끈질기구나, 너도."
 "끈기가 있는 거라고 말해줘."

 "응, 실은 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어."

 "다카코도 참 재미있구나, 그런 녀석과도 어울릴 수 있고. 폭넓게 커버하는걸."
 
Trackback 0 And Comment 1
  1. nike shoes 2013.07.18 23:00 address edit & del reply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나는 너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