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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지금이라도 유학을 간다고 하면 할아부지가 반대허시겄지?"
 나는 그때도 그랬다.
 "아부지가 가시고 싶으면 가세요."
 나는 거침없이 대꾸했다. 유학이란 말은 오래 전, 청년 시절의 아버지가 접은 '학문에으 꿈'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 아버지가 내게 유학이라는 말을 꺼낸 것으로 당신의 마음속에서 '학문에의 꿈'을 완전히 장사지냈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 아버지는 그날 내게 그 말을 했던 것이었다.
(중략)
 맘속으로는 이미 결정해놓고 무슨 일이든 한번 결정해놓고 나면 웬일인지 밀려드는 쓸쓸한 기분 때문에 마지막으로 던져보는 물음, 같은 것 말이다.

 승희 자취방에 승희는 없고 뜻밖에 승희 엄마가 와 계셨다.
 "악아, 니가 우리 승희 친구냐?"
 승희 엄마가 어쩐지 병중에 계신 할머니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네, 제가 승희 친구 해금이에요."
 "춥다, 들어오너라."
 승희 엄마는 내 발을 아랫목에 끌어다 이불로 덮어주고는 내 손을 꼭 감싸쥐었다. 또 눈물이 핑글 돌았다. 승희 엄마가 밥상을 차려 내왔다. 승희 엄마는 따뜻하고 밥은 맛있고 숭늉은 고소한데 나는 왜 자꾸만 코가 맹맹해지고 눈두덩이 뜨거워지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승희 엄마가 할머니 같아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왠지 돌아오지 않는 승희가 어딘가 눈 속을 헤매고 다닐 것만 같아 자꾸만 울음이 비어져나왔다. 딸을 기다리며 딸 친구에게 밥을 차려주는 승희 엄마가 슬퍼보여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왔다. 승희 엄마가 따뜻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누가 나를 대놓고 구박하지도 않았는데 내 인생이 엄청나게 누군가로부터 천대받은 것만 같았다. 천대받은 서러운 인생이 승희 엄마한테 와서야 비로소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만 같았다. 나는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숭늉을 마셨다. 승희 엄마가 내 등을 토닥거려주며 깊은 속에서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악아, 우지 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게로 우리를 마라."

 "이상해서 말이야, 견딜 수가 없었어."
 아직도 반복되는 수경의 말에 나는 이제 더이상은 화낼 수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뭇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게 이상해. 우리 신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이야."
 "미안해, 수경아, 미안해. 화내서 미안하고, 웃어서 미안하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서, 정말 미안해......"
 그건 진심이었다. 그 순간 수경이 화를 냈다.
 "왜, 왜, 니가 미안한 건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건데? 진짜 미안해해햐 할 사람은 가만있는데에, 왜, 왜 그러는 건데에. 내가 말했잖아. 난 단지 이상할 뿐이라고. 이상하고 이상해서 숨쉬기가 힘들 뿐이야. 나도 숨을 크게 쉬며 살고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아. 숨을 크게 쉬려면 가슴이 너무 아파. 여기 이 가슴 한가운데가 터져버릴 것만 같단 말이야."
 수경이 제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 쳤다.
 "수경아, 내가 어떡해야 할까? 어떡해야 니 가슴이 아프지 않을까?"
 "너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니까, 그니까......"
(중략)
 수경이는 아픈데 나는 왜 멀쩡할까.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나야말로 정말 이상한 애라는걸.

 경애도 가고 수경이도 없는 봄이지만 꽃은 피어날 것이다. 경애가 죽었을 때 어린애처럼 한번 터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정작 울지도 못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내리는 수경이 앞에서 태용은 부끄러웠다. 해금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속상한 거는 수경이가 아프기 때문이 아냐. 왜, 왜 난 수경이처럼 아프지도 않고 밥도 잘 처먹고 잘 처자고 속없이 처웃기도 잘하고, 그러는 거냐고. 난 그게 승질이 난다고."
 수격이는 아픈데 자신은 멀쩡해서 해금이는 속상하다고 했지만, 태용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경애가 죽었을 때 어린애처럼 목이 쉬도록 울었던 만큼 부끄러워 죽고만 싶었다. 그렇게 울고도 아프지 않고 멀쩡한 게 말이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자 아버지는 만영과 만강을 두고 출가를 해버렸다. 자신의 부모를 원망하는 만영의 한마디는 이랬다.
 "그게 뭐냐, 책임감 없이."

 승희가 광주 자취방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뇌출혈이었는데 제때 손을 쓰지 않아 어이없게도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엄마 장례를 치르고 나서 승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행방을 감춰버렸다. 석 달을 찾아 헤매다가 우리는 승희를 잊기로 했다. 경애를 잊고 수경이를 잊고 이제 승희도 잊어버리자고. 그래야 우리가 살겠다고. 안 그러면 우리 모두 죽을 것만 같아서.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나지도 말자고 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 제발 아무렇지 않게 '미래를 꿈꾸면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자'고, 승규가 말했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뿔뿔이 흩어졌다.

 "봉쉑이 여자친구여? 그러면 잘되얐네. 요리 좀 차분히 앉아봐아."
 나는 때가 때이니만큼 '차분'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봉석에 대한 추가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억지로 '차분히' 앉았다.
(중략)
 아무래도 이봉석이 집을 알려면 이미 감옥에 간 형 다음 차례로 감옥에 갈지도 모를 '이봉쉑이'의 비리를 '차분히'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 '할 수 없이' 차분해져야 할 순간들이 오기도 한다.

 "역시 여자는 이쁘고 봐야 혀. 나나 늬그들같이 지 맘대로 생겨불면 인생이 낭패여. 안 그냐?"

 나는 막걸리 맛은 대충 알겠는데 아직 소주 맛은 도통 모르겠다. 정신이는 대학교에 들어가서 소주 맛을 제대로 알았다고 했다. 영금이가 소주를 잘 마시는 것도 영금이가 대학생이기 때문인가. 내 신분은 무엇일까. 나는 어쩌면 영원히 소주 맛을 모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천천히 마셔. 그렇게 마시다간 인생 끝까지 못 가는 수가 있어."

 "그래, 영미가 있지. 마영미, 걘 노래를 잘하지. 난 힘으로, 걘 노래로, 그리고 넌 니가 가진 그 무엇으로든, 이 세상을 사랑하자. 이 세상에서 설움받고 핍박받는 서러운 민중들을 위해 우리는 우리 각자가 가진 그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놓자, 해금아."

 문밖으로 얼핏 고모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늦은 귀가였다. 영금을 흔들었다.
 "고모야. 고모랑 함께 들어가자."
 "고모라구? 우리 고몬 늘 마음을 착취당하지. 바보같이."
 나는 영금을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고모를 놓치면 내가 힘들어질 것 같았다.
 "고모오."
 고모가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라냐?"
 "몰라요, 혁명을 한다나봐요."
 "혁명을 해? 기왕에 혁명을 하는 김에 사랑도 하재."
 "야 영금아, 고모가 혁명하는 김에 사랑도 하랜다."
 영금이 바보같이 피식 웃다 빗물 위로 푸욱, 쓰러졌다.

 이 고모는 니가 도대체 뭣 할라고 이 복잡헌 세상에 나와가꼬 이 욕을 보고 사는지 참말로 맘이 안타깝다아, 이 고무 차대기 같은 것아."

 승희도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고 정신이도 서울 가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 나만 집 안팎의 근심거리로 전락한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치만 가난하면 행복하지 못해요. 우리 집만 봐도 어머니가, 아버지가, 형들이, 동생이 행복하지 못해요. 그래서 날마다 전쟁이죠. 사는 게 엉망진창이고, 기도 같은 건 할 줄도 모르고, 미래는 늘 오늘에 저당잡혀 있죠. 그래서 사는 게 나아질 수 없고, 그렇게 살다 죽을 것이 난 겁나요. 어쩌면 밀레는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저 그림을 그렸는지도 몰라요.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아서. 많이 힘들고 고달프지만 그래도 평화롭게 살고 싶어서.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정말로."
(중략)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단다, 이환.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어야 말이지. 그냐, 안 그냐?"
 "......"
 "말문 막히는 말을 왜 허냐?"
 고모는 여전히 씩씩거렸다.
 "건방떨지 말라고오. 아직 기저귀도 안 뗀 것이 말여. 머? 가난해도 행복? 지랄 염병허고 자빠졌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때, 그래서 눈여겨보지 않을 때, 나 혼자 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나는 기뻤다. 나는 그가 그 이름처럼 얼마나 환한 사람인지를 세상 사람들이 몰라도 좋았다.

 한편으로 나는, 환이 왜 죽으려고 했는지응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슬펐다. 환과 나 사이에 내 힘으로 뛰어넘지 못할 거대한 장벽이 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는 환에게 내가 아닌, 나보다 이쁜 승희거나, 나보다 똑똑한 정신이거나, 하다못해 노래를 잘하는 영미 같은 여자친구가 있었더라면, 환이 굳이 죽으려고까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살아갈 의지를 북돋아줄 만한 그 어떤 것도 내가 가지지 못해서 환이 죽으려고 했던 것일까.

 만영이 산 아래 동네의 깜박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담배가 맛있냐?"
 "천상의 별, 지상의 별."
 만형이 하늘과 산 아래를 번갈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만영의 그런 태도는 노동하는 사람이 지닌 '여유'임이 분명했다.

 "인생이란 것이 한 큐에 설명이 안 되는 것인 줄은 안다만, 나는 당최 니년들 속을 모르겄다. 야 근디 영금이 걘 감옥서 아조 행복하드라이? 빠다 한 통에 그냥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지는데...... 아이고 속없어라."
 엄마와 나는 비장한데 쇠창살 저쪽에서 영금은 명랑했다. 그것이 자칭 전사, 마영금의 힘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영자네 집에서 영금의 술친구가 되어주고 있을 때, 만날 새우깡만 시키는 게 안돼 보였는지 영자가 자신들이 먹던 국을 한 그릇 가져다준 적이 있었다. 김칫국에는 영자 아이가 빠뜨린 밥알이 동동 떠다녔다. 영금이는 밥알이 떠 있든 말든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그때, 왜 그렇게 속없이 웃느냐는 내 핀잔에 영금이 폼을 잡고 말한 적이 있다.
 "정을 주는데 웃지, 그럼 우냐?"
 엄마는 집에 와서 끼니 때마다 반찬도 없이, 영금에게 차입시켜준 '빠다', 그러니까 마가린으로 밥을 비벼 멌었다.
 "이렇게 비벼 먹으면 감옥 밥도 먹을 만하겄다 야."
 천성적으로 밝은 엄마도 그러나, 그렇게 밥을 비벼 먹고 나서는 남몰래 울었다. 반찬 없이는 먹었지만 밥을 먹은 것조차 미안하고 아파서.

 "왜, 기분 나쁜가?"
 "기분 나쁘지요. 초면인데 교양 없이 반말을 하시니까."
 "아이고, 미안해요. 공장 밥만 먹다보니 언제 교양 쌓을 시간이 없어서리...... 하하하."
 남자릐 웃음소리는 혐오스러웠다. 정신은 말했다. 상대보다 힘이 세다고, 더 많이 배웠다고, 더 많이 가졌다고, 더 우월하다고 믿는 자들이 부리는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그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을 견뎌내야 한다고. 모든 오만한 자들이, 모든 무뢰배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떄까지. 견디고 견뎌서, 그 견디는 힘으로 우리가 아름다워지자고. 왜냐하면 모든 추함은 모든 아름다움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에서 출발한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에, 동물적 본능의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인간의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 때문이라고, 동물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의 과정이야말로 진보의 역사라고, 정신은 힘주어 말했었다.
 오늘, 저 무뢰배의 오만이 횡행할 수 있는 이 야만의 구조, 이 동물적 상황을 나는 견뎌야 한다. 저항하기 위해 견딜 것. 아름다워지기 위해 지금은 견딜 것.

 야만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진보의 역사라고.

 피흘리는 경애를 안고 목놓아 외쳤다는 수경이.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소리.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임을 외치는 소리. 그리고 수경은 목이 터져라 외치다가, 화답 없는 세상에 절망하여 저세상으로 떠났다.
 나는, 이제라도 회답해야 한다. 내가 인간이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내가 우리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 쪽으로 돌려놓고자 한다면.

 나는 꼭 어린애가 제 부모한테 바깥에서 당한 설움을 이르듯이 말했다.
 "경찰들이이, 무조건 우리만 패는 거에요 글쎄에. 우리같이이 힘없는 사람들이이 뭐가 무섭다고오 그렇게 때리는지이 정말 알 수가 없더라니까요."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그거야 힘없으니까 그렇지. 힘센 사람을 때리겠어?"

 "그래서 인자 어떡헐래?"
 엄마는 내가 서울에서 내려온 이래로 틈만 나면, 나의 '인생계획'을 물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엄마에게 말해줄 수 있는 인생계획이란 것이 없으므로 침묵할 수밖에.
 "너한테 겁나게 불리헌 질문이었던갑다이, 입을 딱 봉해분 것이."
 나는 밥만 먹었다.
 "엄마, 그것이 바로 묵비권이라는 거랍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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