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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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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 받을까 하는 두려움은 잠시 미뤄두자. 예방주사도 자국이 남는데 하물며 진심을 다하는 사랑이야 어떻게 되겠니.

 우리는 우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정복하려고 그들을 추적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자아 존중감을 증가시키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살기에도 짧은 세상에 말이야.

 너무 옳아서 잔인한 말씀

 당신은 진정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진정 깨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진정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안도하는 것입니다. 치유란 늘 고통스러운 것이니까요. 그것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편견과 기대라는 관념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누구도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할 따름입니다.
 결국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성장하기를 진실로 원하지 않습니다. 달라지기를 진실로 원하지 않습니다. 행복하기를 진실로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더군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골치만 아프게 될 테니까요.'

 엄마는 충분히 불행했음에도 변화하기가 두려웠단다. 왜냐하면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은 미지이기 때문이지. 설사 여기서 괴로움이 있다 해도 그것이 내가 아는 것이라면 그게 더 나았던 거야.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내 삶을 사는 것, 그건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남에게 살도록 요구하는 것, 그것이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기심은 남들이 나의 취향, 나의 자존심, 나의 이득, 나의 기쁨에 맞추어 살도록 요구하는 데 있습니다. 부인은 내가 나의 행복을 희생하여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부인은 부인의 행복을 희생하여 나를 사랑하고 나는 나의 행복을 희생하여 당신을 사랑하겠고, 그래서 불행한 사람 둘이 생겨나겠지만, 사랑 만세!

우리는 나이 들수록 의문을 품지 않고 질문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배운 삶의 가치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 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 된다. 절대적이고 당연한 가치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온전히 너의 삶은 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너와 네가 사는 세상을 낯선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인생을 멋지게 설계하기 위해서 말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이란, 예수가 죽은 후 그의 제자 둘이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어떤 훌륭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그 길을 말하는 거야. 근데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자신들이 죽었다고 슬퍼하고 있는 바로 그 예수였어. 그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몹시 실망하고 있어서 부활한 예수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었던 거지.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스승이 죽어서 부활한다는 사실보다 어쩌면 그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상심하고 있는 자신들의 마음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르니까.

 고통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과 작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고통을 놓아버린 후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늘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 석에 앉혀놓고, 피고석에 앉아 우리의 행위를 변명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당신이 당신을 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그 잣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주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하게 해주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세 사람이 있는데, 가장 힘센 자가 가장 힘없는 자를 착취하려 할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힘없는 자를 아프게 하지 못 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 천국은 이미 이곳에 있다.

 미움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외에는 그 방법을 모르는 우리 상처받은 인간들

 고난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온다. 아니 어쩌면 불공평하게 오지.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나 나쁘게 사는 사람에게나 공평하게 닥치니까.

 내가 나 아니기를 바라던 동경이 얼마나 큰 형벌인지

 내가 나 자신이 아니기를 동경하여 시기심으로 눈이 멀어버린 듯한 그런 친구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함께 한탄하는 것을 다릉 사람을 위로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아. 진정한 우정은 그의 성취에 그의 성공에 함께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고, 이런 일은 대개는 '스스로가 스스로임을 좋아하고 행복한', 스스로와 스스로의 삶에 긍정의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더구나.

 우리의 동경이 현세에서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사랑하지 않아도, 우리를 배반하고 신의 없게 굴어도, 삶은 어느 날 그것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가만히 들려주게 될 거라고, 그날 너는 길을 걷다가 문득 가벼이 발걸음을 멈추고, 아하, 하고 작은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 두려워 말고 새로이 맑은 오늘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이야.

 우리는 언제나 열렬히 사랑하기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서둘러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거야.

 연애에는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에는 실패하는 일이야. 네 목표가 연애를 잘 하는 것이라면 그런 책들이 유용하겠지만 네 꿈이 누군가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라면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진정한 자존심은 자신에게 진실한 거야. 신기하게도 진심을 다한 사랑은 상처받지 않아. 후회는 언제나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을 속인 사람의 몫이란다.

 더 많이 사랑할까봐 두려워하지 말아라.

 누군가가 자신의 엄격한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 자신의 비현실적 기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상해서 상대를 지목하고 그를 독선적으로 비난한다.

 가끔 사람들은 말하지. '인생에서 상처 받은 사람등이 한 둘이야?' 엄마는 이런 어법을 아주 싫어한다.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너의 후두염이 경시 받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인생은 고통 콘테스트가 아니잖아.

 어느 해질 무렵 수녀님들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나가보니 헐벗은 나환자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마더 테레사는 즉시 음식과 담요를 내 주었다. 그런데 그 가난한 나환자가 진지하게 말했다.
 "수녀님 오늘 제가 여기 온 것은 뭔가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수녀님이 어디선가 큰 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제가 구걸해서 번 돈을 선물로 드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수녀님 비록 약소하지만 제 선물을 받아주십시오."
 참고 참았는데 이 헐벗은 나환자가 결국 엄마를 울리고 말았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정말일까? 그래,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럴 수 있다는 걸.

 위녕,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어제는 태풍이 대한해협을 통과했다지. 태풍은 열대의 뜨거움을 강제적으로 온대지방으로 전달해 내는 자연의 방식이라는데, 고여 터질 것 같은 열대의 정열이 온대지방으로 오면 거의 폭력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엄마는 오래 전에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본 일이 있어. 마음 속의 압력들을, 사소한 분노들을, 실망감과 상처들을, 어쩌면 뜨거운 사랑까지도, 조금씩 처리하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그렇게 내 마음의 뜨거움들도 다른 이들에게 가서 폭력으로 변하지 않을까 함께 겁이 났었지.

 엠마뉘엘 수녀님은 소르본에 진학하는 기회를 놓치고 자신의 노트와 책을 불살라 버린 후 빈민가로 들어간다. 그녀는 어느 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을 마친 후 신 앞에 섰을 때 신이 그녀에게 소르본을 나왔는지 아닌지 묻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야.

 왕의 기분을 전환시켜 자기 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생각밖에 없는 사람들로 왕은 둘러싸여 있다. 아무리 왕이라도 자기 생각을 하게 되면 불행해지니까.

 창작이 다른 직업이 지니는 기본적인 고통과 다른 근본적이고 특이한 고통을 지닌 듯 폼 잡으며, 그것은 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글을 쓴다는 것이 무슨 하늘이 내린 형벌인 듯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세계 명작 동화에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잔인과 범죄가 나오는 걸 보면 사실은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그저 사실인 거야.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단숨에 되지 않는다. 사막을 횡단하려면 작은 걸음들이 수백만 번 필요하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이 길의 한부분이 되고 경험의 일부가 된다. 모든 탐험이 매번 진짜 삶이었다. 고비 사막의 횡단은 성공적이었다. 물론 고비 사막을 횡단 했다고 해서 내가 현명해 진 것도 아니고 녹초가 된 것도 아니다. 늙어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위녕, 이 다음에 너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하는 생각해본 적 있니? 엄마는 가끔 생각해.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지금 믿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도 중요해지지 않을 때가 있다면 그때 나는 지금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그때 내가 내 앞에 주어진 생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던가 하는 거 말이지.

 아마 2001년이라고 기억되는데 봄철에 아주 심한 가뭄이 들었다. 논들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온 나라에 심어놓은 모들이 말라죽을 위기에 처했었지. 양수기가 동이 나고 농부들은 온 힘을 다해 논들에 물을 대었단다. 대단한 가뭄이었어. 그리고 그해 가을이 되었어. 해마다 초가을이면 찾아오는 태풍 중에서 가장 거센 것이 한반도를 덮쳤지. 모두들 가뭄을 겨우 이겨낸 들녘에 다시 바람이 부는 걸 보니 이번 해 농사는 망쳤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결과는 생각과는 아주 딴판이었어. 그토록 거센 태풍은 놀랍게도 벼 이삭들을 거의 쓰러뜨리지 못했어. 심지어 그해 가을에는 사상 유래가 없는 풍년이 들었단다. 전문가들이 무심히 이야기하더구나. 이 심한 태풍에도 피해가 거의 없었던 것은 봄날의 가뭄 때문이었다고. 그러니까 봄날에 벼들이 막 땅에 제 뿌리를 묻었을 때 부족했던 물 때문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했고, 그래서 거센 태풍에도 불구하고 벼들은 쓰러지지 않았다고 말이야.
 변명하는 말이 진정 아니기를 바라지만, 젊은 날의 고통은 얼마나 가치 있고 귀중한 것인지 엄마는 알게 되었단다. 왜 젊은 시절의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있는지도 알게 되었단다. 그건 그냥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상투어가 절대로  아니었다는 것을. 젊은 시절은 삶의 뿌리를 내리는 계절. 무사태평하게 그 시절들을 보내다가 이미 모든 것이 무겁게 익어버린 가을날에 태풍이 덮치면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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